티스토리 뷰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감상평 (영문 타이틀: Two days, one night )
https://youtu.be/grHTQajXf4I
1. 시놉시스
당신은 20명 가량 인원의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병으로 잠시 직장을 쉬었다가 이제 복직을 준비하는 참입니다. 어느 금요일에 당신에게 전화가 걸려옵니다. 사장이 당신의 동료들에게, 당신을 복직시키는 대신 각자 보너스를 받는 것을 제안했고, 대부분의 동료들이 그 제안에 동의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찌어찌 사장과 담판을 짓습니다. 사흘 뒤 월요일의 재투표에서 과반 이상의 동료들이 당신의 복직에 찬성하면 사장은 그에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제 당신은 주말 동안 당신의 동료들을 찾아가 설득해야 합니다.
2.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당신이 이 영화의 주인공 산드라라고 가정해 봅시다. 위의 난감한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본다면, 당신은 어떻게 동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영화를 보던 중 저는 가장 먼저 ‘단결’이나 ‘연대’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을 떠올렸습니다. 연대의 가치에 호소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뭉치기 위해 사용된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방법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연대와 단결은 공동으로 맞서 싸울 적(가령 자본가)에 대해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당신의 생존을 부탁해야만 합니다. 얼마 전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 동료는 이미 당신 대신 보너스를 택했다고 합니다. 정말 기운 빠지는 상황입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과 그에 따른 현실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산드라는 이 상황을 굉장히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동료들을 만나서 “함께 일했던 동지로서 연대해 줘” 와 같은 추상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는 이 일이 필요해. 그러니 나를 지지해 줘.”라고 말할 뿐입니다. 사실 그것이 그녀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지지하는 반대급부로 무언가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녀를 선택하게 되면 그들에게 제공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보너스를 빼앗는 결과가 됩니다. 도대체 누가 눈앞의 떡고물을 포기하고 동료를 선택할 것인가. 생각하면 별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설득하러 다니는 산드라 스스로 이 상황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줄을 남에게 전적으로 맡겨놓는 것만큼 비참한 상황은 드뭅니다. 산드라의 운명은 전적으로 회사 동료들의 손에 있습니다. 어떤 추상적인 가치에도 호소할 수 없다면, 아마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방편이 남을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기는 합니다. 그래서 산드라는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 같다고, 거지꼴이 되는 것 같다고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산드라는 비굴한 태도까지 취하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동료들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정말로 보너스가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재차 설득하려 들거나 눈물에 호소하지도 않습니다. 거절당할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타들어가지만, 그녀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돌아설 뿐입니다. 그것이 그녀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품위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산드라의 개인적인 이유도 있긴 합니다만.
3.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것
위의 내용까지만 보면, 이 영화는 처절한 상황에 놓인 어느 한 노동자의 절박한 실존을 다룬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이렇게만 보면 이 영화를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핵심은, 산드라가 한 명씩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과정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것, 바로 이 부분입니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일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산드라의 복직 대신 보너스를 선택하는 동료들도 다들 개인적인 사정들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곤궁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개개인입니다. “나도 너가 일하는 걸 반대하지는 않아. 하지만 난 보너스가 필요해.” 이 짧은 말 앞에서 산드라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말에 마음을 바꾸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라고 딱히 더 유복한 처지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산드라 대신 보너스를 택한 것을 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녀와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이었든, 종교적 신념 때문이든, 혹은 그녀의 처지를 딱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든 간에, 어쨌든 그녀의 저 짧은 호소(“나를 선택해 줘”)에 그들은 응답합니다. “그래, 내 표를 너에게 줄게.”
그리고 이 예상하지 못한 변화는, 산드라의 동료들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서도 일어납니다. 영화에서 그녀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나 집에 갈래.”입니다. 아직 병이 완치되지도 않은 그녀는 이 피곤하고 괴로운 작업에 쉽게 지치고 맙니다. 동료가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 혹은 자신의 방문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상처입은 그녀는 모든 걸 손에서 놔 버리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녀를 일으켜세우고 격려해주는 남편과 친구들 덕분에, 그녀는 간신히 간신히 다시 일어나 다음 집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동료들의 지지에 힘입어 그녀는 조금씩 웃음을 되찾습니다. 차 안에서 락 음악을 틀고 동료와 함께 웃으며 노래부르는 장면은, 이제 그녀 자신에게나 동료에게나 모두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명씩 만나서 대화하고, 때로는 울고, 때로 웃으며, 조금씩 서로가 변하는 과정들. 그 과정은 어찌 보면 반복적이고 지루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마냥 손놓고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많은 일들이. 생각건대 감독은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거대한 언어들을 늘어놓는 대신.
(영화 뒷부분에서는 등장하는 재투표 및 그와 관련된 장면들에 관련해서도 적어보고 싶지만, 굳이 스포일러가 될 내용을 적고 싶지 않아서 여기까지만 적습니다.)
4. 기타
주인공 산드라 역의 마리옹 꼬띠아르를 처음 봤던 것은 <라 비앙 로즈>에서였습니다.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절절한 삶을 그려내는 혼신의 연기를 보며 감탄했던 게 기억나는데, 이번에 그녀는 평범한 노동자 계층의 주부이자 노동자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영화 초반에 위축되어 있는 산드라라는 인물이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훌륭하게 그려냅니다. 그녀가 차 안에서 자신을 격려하는 남편에게, 그리고 자신을 지지해 주는 동료에게 웃어주는 장면은, 괴로운 영화의 현실에서 그리고 현실의 현실에서 잠시나마 관객들에게 위로가 되는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얼마 전 영화 <카트>의 감상평을 썼습니다. 두 영화 모두 노동자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하지만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그에 비하면 훨씬 간명하고 담백하고 직설적입니다. 이 영화에는 숨을 멈추게 하는 극적인 장면도 없고 빵 터지는 장면도 없으며 그간의 갈등을 깔끔하게 씻어내는 카타르시스 넘치는 드라마틱한 장면도 없습니다. 갈등은 깨끗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점에서 정말 현실적입니다. 하지만 가령 앞서 말한 산드라와 동료 간의 웃음처럼, 혹은 산드라의 마지막 대사가 주는 작은 여운처럼, 감독은 영화 곳곳에서 잘잘한 온기를 담아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면 이 영화를 보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덧. 한겨레 칼럼에서 문강형준 씨가 이 영화에 대해 평하는 내용도 인상깊어서 링크를 함께 적어둡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72945.html
* 예전에 다른 사이트에서 썼던 글을 블로그로 옮겨둡니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카트> 리뷰: 여성-노동자의 투쟁일기 (0) | 2018.03.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