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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세상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을까? 질문의 범위를 좁힌다면, 우리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 투명하고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달에 착륙한 우주선의 컴퓨터보다 더 높은 성능의 휴대폰을 사람들이 들고 다니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카카오톡을 통해 24시간 서로에게 연결되고 틴더를 통해 원하는 연애 상대를 찾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은연중 그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기술이 우리 사이를 메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이어주고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하지만 미래소년이 등장해야 할 것 같은 2020년이 되어도 여전히 우리는 고독하고 서로에 대해 오해하며 갈등한다. 그렇기에 다시 질문이 생겨난다. 기술을 통해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인 것일까?
우리는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은 양가적인 답변을 읽게 된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흠 없는 인간’을 만들더라도, 차원도약을 통해 우주를 탐사하는 시대에 살더라도, 뇌의 신경망 전체를 스캔해서 데이터베이스를 복제하더라도, 유기적 신체를 강화물질로 대체한 사이보그가 되더라도, 그런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다. 커뮤니케이션은 예전과 같이 여전히 미끄러지고 왜곡되며 부딪히는 가운데 진행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우리들 사이의 완전한 이해불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할 것이다.

1. 커뮤니케이션: 이해와 오해 사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의미의 전달’이다. 이는 그릇 A(화자)에서 그릇 B(청자)로 내용물(의미)을 그대로 옮겨담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화자가 생각한 바를 청자가 모종의 매체를 통해 전달받은 뒤 똑같이 표상하게 될 때 커뮤니케이션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고 간주된다. 이해는 이러한 투명성이 담지된 상태이며, 반대로 오해는 전달 과정에서의 오류로 두 표상이 동일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이런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이해는 곧바로 벽에 부딪힌다. 두 그릇에 담긴 내용물의 동일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화자와 청자 사이에 전달된 의미를 우리는 일일이 확인할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은 폐쇄된 영역이기 때문에 뚜껑을 열고 안을 볼 수 없다. 혹은 화자와 청자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멀리 떨어져 있어 이해 여부를 재차 확인할 수 없을 때도 있다. 화자와 청자가 사용하는 매체가 완전히 달라서 의미의 전달 여부를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장벽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는 사태들이다. 연인들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서로의 머릿속을 열어볼 수 없기에 본심을 재차 확인하고 싶어 한다. 수백 년 전에 작성된 글을 읽으며 우리는 작성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지만 알 길은 없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인간들 사이에서, 혹은 다른 동물종과 인간들 사이에서 의미의 동일성은 파악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라는 숙제를 안고 살아간다. 수많은 의미들이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며 범람하지만, 과연 그들 중에서 제대로 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얼마나 될까? 아니, 애초에 그런 이해라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2. 커뮤니케이션의 조건: 너와 나 사이의 균열

앞서 제기된 이런 의문들은 여러 창작물들의 모티프가 되었으며, 이 의문을 해결하는 여러 기술적인 상상력들이 제시되어 왔다. 가령 상대방의 본심을 확인할 수가 없다면, 말 그대로 ‘뚜껑을 열고’ 상대의 마음을 읽어버리면 어떨까? 가령 뇌를 통째로 스캔해서 인식하면 사고 내용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수 백 년 전 인물의 생각이 궁금하면, 타임머신을 타고 건너가서 물어보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김초엽 작가의 답은 모두 ‘아니오’로 보인다. 다시 말해, 설령 그런 기술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세계에서조차 우리가 상상하는 투명한 이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독자가 반복적으로 발견하는 주제는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들이다. 주인공들은 타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지만 그 노력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스펙트럼>에서 희진은 언어매체가 자신과 완전히 다른 외계생명체와 대화해보려 하지만 실패한다. <공생가설>에서 두뇌 판독 기술을 통해 사고의 내용을 파악하는 기술이 등장하지만, 연구진들은 아기들이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아니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맞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감정의 물성>에서 정하는 연인 보현이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약을 먹는 대신 ‘우울체’를 손에 쥐려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의 재경이 왜 임무에 뛰어드는 대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가윤은 알지 못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첨단 기술을 통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투명한 이해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모습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가령 <공생가설>에서 볼 수 있듯이, 두뇌 스캔을 통해 머릿속의 사고를 읽어낼 수 있게 되더라도 그로부터 타자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가능성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세계에 직면하는 사태와,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기술을 통해 주어지는 어떤 정보값의 제공과 그에 대한 이해는 동일하지 않다. 타인의 생각을 읽어낸다 한들 그 ‘읽어냄’은 하나의 이해이지 타인의 생각 자체가 아니다. 내가 가진 이해가 타인의 생각과 동일한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고 한들, 그 역시 나의 이해를 정보값으로 갖는 타자의 이해는 타자의 이해일 뿐이다. 이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아르키메데스적 점이란 없다.
이처럼 정보와 이해 사이에, 타자와 나 사이에 균열이 존재할 때, 그 사이를 완벽하게 메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환상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근본적인 조건 자체가 이러한 균열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값과 이해가 동일하려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서로 타인이 아니라 동일한 주체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동일성이 주어져 있다면 애초에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커뮤니케이션이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이라면, 이는 먼저 차이가 존재할 것을 전제한다. 그렇기에 커뮤니케이션은 늘 알지 못하는 타인을 필요로 하고, 그 결과 마찰과 미끄러짐과 왜곡이 일어날 가능성을 피할 수 없다.

3. 기술의 발달은 차이를 없앨 수 있을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커뮤니케이션을 왜곡시키는 그 차이를 정말 메워버릴 수 없는 것일까? 얼핏 생각해보면 이러한 기술적 가능성에 대한 상상이 그리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가령 우리는 인간의 가청 범위를 넘어서는 고래의 초음파를 수중청음기로 수신, 분석하여 고래의 수중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파악한다. 마찬가지로 기술을 통해 세계에 대한 파악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면 점점 더 오해와 왜곡의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차이를 좁히고 메운다면 커뮤니케이션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그러나 작가는 이와 같은 상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차이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왜곡을 피할 수 없다. <스펙트럼>의 다음 구절에서 언급되듯이 말이다.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만날 때는, 우리는 더는 유약한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도구를 가져갈 것이다. 그들에 관한 정보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분석하고 그들의 문자를 분석할 것이다. 루이와 할머니의 관계는 재현될 수 없을 것이다.”

루이와 희진은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서로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배려하는 가운데 공유된 세계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들은 서로의 몸짓의 의미를 하나씩 깨닫고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간다. 이는 루이와 희진이 이방인으로 만났다는 사실, 특히 희진이 루이 일행의 행위맥락 속에 참여자로서 포함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분석적-관찰자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 우리는 루이가 사용하는 언어를 외부의 관점에서 기술적으로 분석하고 체계화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더 이상 루이와 희진 사이에 존재했던 커뮤니케이션을 재현하지 못한다.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사태는, 사실 우리와 타자 사이의 관계에서 파괴되는 것들을 통해 성립한다. 
조금 다른 맥락에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기술을 통해 차이를 무화하는 세계가 결코 우리가 그리는 유토피아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 세계에서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 배아 단계에서부터 모든 질병을 제거하고 우수한 특질만 갖게 된 개인들이 태어나게 되지만, 이런 개조인들로 가득 찬 세계는 결코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차별과 멸시,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은 이 세계에서 여전히 현존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테크놀로지 자체에 대한 부정적 전망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다시 말해 기술적 디스토피아를 그리거나 기술의 부정적 사용가능성을 경고하는 것은 이 소설집의 주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작품에서 분명히 기술은 발달되기 이전과 비교하여 어떤 기여를 수행한다. 새로운 항법은 우리를 더 멀리 데려다주고, 의학기술의 발달은 질병을 치료하며, 인지과학의 진보는 뇌의 작동과 정신 사이의 연관에 대해 더 많은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세계와의 연관에 있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기술은 기여도를 갖는다. 다만 소설에서 읽어낼 수 있는 지적은, 커뮤니케이션에서 우리가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디까지나 환상이라는 사실이다. 기술은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지 타자와의 관계를 클라우드 동기화하듯 실시간으로 묶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에서, 결코 닿을 수 없는 완벽한 이해에 조금이라도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그리고 여기에서 기술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가능성이란 무엇인가?

4.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것들을 통해 다가가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즉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시도하는 것은, 타자와의 간격을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간격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통해 조금씩 좁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와 타자는 매개를 통해 무지에서 이해로 다가간다. 우리의 사태 이해는 “1+1=2.” 혹은 “이것은 책상이다.”처럼 대상에 대한 단선적 규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개들을 통해 계속해서 변하고 확장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매개적 커뮤니케이션이 이 소설집에는 자주 등장하는데, 그 특징은 매개들이 반드시 언어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관내분실>에서 지민이 엄마 은하를 사후에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는 계기는 엄마의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엄마가 남긴 작업의 습득이다. 엄마가 무슨 작업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아버지에게 전해들으며 지민은 자신의 삶의 궤적과 겹쳐지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다가간다. <공생가설>에서 두뇌 스캔 작업을 하던 연구진이 어린 아이들의 사고, 더 정확히는 아이들 속에 존재하는 또다른 실체들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류드밀라의 그림을 통해서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가윤은 신체 강화 과정을 모두 마친 뒤 비로소 재경의 생각을 짐작한다. 엄마의 삶과 작업, 류드밀라의 그림, 그리고 사이보그 그라인딩이라는 요소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이들은 주인공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징검다리가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술 역시 하나의 중요한 매개체로 기능한다는 사실이다. 자연세계의 대상을 탐구하고 가공하는 방법으로서의 기술은 인간이 세계와 맞닿는 범위를 확대한다. 가령 돌고래나 박쥐의 초음파를 인식하는 기술을 통해 우리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파악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단지 폭을 확장하는 것을 넘어, 자연의 타자들과 교류하는 근본적인 방식에 대한 변화까지 수반한다.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신경계의 작동을 파악하고 나서, 다른 동물들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동물을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술을 통한 세계와의 관계맺음은, 비단 인간과 외부 자연 사이의 관계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 자연세계의 범위에는 인간 자신도 포함된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재경과 가윤의 신체가 사이보그 강화로 변형된 이후, 그들은 그 전과 전혀 다르게 세상을 보게 된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에 의해 인간 자신과의 관계까지 변화될 때, 인간은 기술적으로 인간의 내적 본성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기술적 진보를 통해 우리에게는 자신과 관계맺을 새로운 길이 열린 이후, 우리의 커뮤니케이션도 그 전과 다른 양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물론 매개적 커뮤니케이션조차 상대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담지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커뮤니케이션의 조건으로서 나와 타자 사이의 균열이라는 전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감정의 물성>의 정하와 보현이 부정적 감정을 둘러싸고 겪는 것과 같은 매개적 실패이다. 타자와의 사이에서 발견되는 사태를 통해 이해가 진척되는 대신, 어느 일정한 단계에서 멈추고 마는 상황이 훨씬 자주 발견된다. 이런 의미에서 타인에 대해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일일지도 모른다. <관내분실>의 지민이 정말로 엄마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의 가윤은 재경의 생각을 이해한 것일까? <스펙트럼>의 희진이 루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알아들은 게 맞을까? 이들 모두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우리는 결코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

5. 그럼에도 커뮤니케이션하는 이유

이처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드러나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관점은 양가적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세계에 대해 완전한 이해를 가질 수 없다. 어떤 기술도 신과 같은 전지적 관점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이해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며 그 과정 속에서 상대를 조금씩 이해해나간다. 물론 그 이해가 완결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발터 벤야민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아무리 가까워도 멀리 떨어져 있는 일회적인 현상einmalige Erscheinung einer Ferne, so nah sie sein mag.” 제의적 기원을 갖는 이 개념은, 아무리 대상에 가까이 접근하더라도 또한 닿을 수는 없는 신성한 분위기를 일컫는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커뮤니케이션 역시 이와 유사하다. 아무리 가깝고 친밀한 대상 사이에서 일어나더라도 완전한 이해에 닿을 가능성은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애초에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왜 실패할 위험을 무릅쓰고, 아니 심지어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커뮤니케이션을 할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 안나는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워프 항법을 통해 날아갈 우주선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먼저 워프 항법을 통해 출발한 가족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무리 정류장에서 기다려도 안나가 기다리던 우주선이 출발할 일은 없을 것이었고, 안나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워프 항법을 통해 가족들을 따라가더라도 안나가 그들을 만날 가능성은 없다. 그렇지만 안나는 우주선을 탈취하여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날아간다. 워프 도약을 할 수 없는 안나는 몇 만 년이 지나도, 아니 몇 백 만 년이 지나도 슬렌포니아 행성계에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우주선을 타고 날아간다.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들이기에 커뮤니케이션한다. 비록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신호를 발신하고 수신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닿을 수 없는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수많은 커뮤니케이션을 날려보낸다. 그들이 언젠가 닿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우주 속 외로움의 양을 줄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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