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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하일권


시놉시스: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외계세포가 등장한다. 수능을 준비하고 있던 고등학생들은 갑자기 전시 예비병력으로 편입되어, 세포와의 전쟁에 내몰린다.



수능공부를 하던 고등학생들은 갑작스러운 외계세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예비병력이 됩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왜 군인이 되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지만, 대입 가산점을 준다는 말에 결국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피소를 포기하고 훈련을 선택합니다. 얼핏 황당해보이는 이 설정은 무척 한국적이어서 오히려 설득력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전장에 투입된 주인공은, 친구들이 한 명씩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이 죽음은 급작스럽게 찾아옵니다. 누가 어떻게 죽을지는 임의적입니다. 이 임의성은 전쟁이라는 재난상황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전쟁 상황에서 등장인물이 죽는 건 뭘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힘이 세다고 해서 포격을 피할 수 없고, 생각없이 한 행동으로 죽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방과후 전쟁활동>은 <유쾌한 왕따>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됩니다. 두 작품 모두 처참하고 비참한 풍경이 펼쳐지지만 <유쾌한 왕따>가 먹고 사는 생존을 위해 빼앗는 처절함에 기반을 둔다면, <방과후 전쟁활동>은 어느 순간 옆 사람의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데에서 오는 절박함과 처연함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 공포스러움 속에서도 주인공과 친구들이 예비군으로 편입되길 거부하지 않은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예비병력을 위험한 현장에 투입하지 않을 거라는 거짓말과 더불어 대입 가산점이라는 당근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일반 군인처럼 최전방에 투입될 것이라는 것. 대학 입시라는 불투명한 목표에 앞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를 깨닫고도 이탈자는 극히 드뭅니다. 학생들은 친구들을 두고 떠나기를 꺼려하는데, 그건 미안함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 부조리한 상황을 견디게 하는 것은, 군대 안에 이들이 남도록 하는 것은 오직 전우애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귀찮아하던 친구를 위해 하이바를 건네거나 몸을 던지고 때로는 목숨도 바칩니다. 그렇게 이 전쟁은 유지되고 굴러갑니다. (그리고 이들은 전쟁에 함께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거리를 둡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언급하면, 대체 재난 상황이라는 것이 특별히 유의미한 요소인가 싶습니다. 학교에서 생겨나는 공동체란 우정에 기반을 두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요. 다시 말해 극한 상황에 내몰린 경험은, 이들의 세계를 어떻게 바꿔놓을까요? 재난 이후의 세계가 결코 이전의 세계와 같을 수 없었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일까요? 



그들이 잃어버린 것들


작품 초반부와 후반부를 잠시 비교해봅시다. 훈련에 참여한 이후, 친구들을 잃을 때마다 소대의 분위기는 매우 침울해집니다. 죽은 누군가의 이름이 계속해서 이야기됩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상실은 익숙해집니다. 그들의 내면을 알 길은 없지만, 후속 작전을 위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죽은 친구의 이름은 한두번 입에 오르내리다 사라집니다.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온전히 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칩니다.

이 부분에서 혹자는 <퍼시픽>의 장면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태평양 전선에 참여한 주인공은 참혹한 전투를 끊임없이 겪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주인공은 다친 곳도 없이 멀쩡해 보이지만, 곧 혹독한 트라우마를 겪습니다. 밤에 잠을 자는 내내 악몽을 꾸고, 사냥을 가다가 털썩 주저앉아 버립니다. 전쟁에 참여한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정은 <방과후 전쟁활동>의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모든 것이 잘 끝나고 무사히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면, 그 자체가 내용상 부조리합니다. 그 부조리에 걸맞은 비극적인 결말이 작품 후반부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말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가가 결말의 개연성을 단지 한 개인의 특수한 성격(비사회성)과 결부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해당 개인에게 정신적 고통이 어떻게 쌓여갔는지를 작품 초반부터 보여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성격과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마치 이 전쟁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진 사람은 한 사람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은 그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을 무사히 마친 주인공과 친구들은 그리고 학교로 돌아갑니다. 단, 그제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천천히 깨닫게 되겠지요. 죽은 친구는 돌아오지 않고, 자신들이 가진 상처도 기억도 온전히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상실을 보상하지는 않습니다. 대입 가산점이라는 무의미한 보상만이 그들에게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맹점 - 관리되는 개인들


이 작품에서 재난의 직접적인 요인인 외계세포에 대한 설명은 무척 피상적입니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성분은 무엇인지,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피상적인 존재가 또 있습니다. 바로 관리 체계로서의 조직입니다. 이 조직은 가산점이라는 제도로 학생들을 유인하여 병력자원으로 만듭니다. 학생들은 위험한 곳에 투입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듣고 훈련에 지원하지만, 전방 병력 소모가 예상 외로 크기 때문에 기본 훈련만 마치고 곧바로 학생들을 전장에 투입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전투자원으로서 관리되는 학생들은 상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릅니다. 그들은 훈련받는 내내 불평하긴 하지만 결국 과정을 모두 소화해냅니다. 훈련 이후 어디로 배치되는지도 묻지 않은 채 군인들의 말을 듣고 따라갑니다. 시키는 대로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죽고 다치는 사람이 속출하는 가운데, 그들이 무엇을 보상으로 받았는지는 얘기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작품의 풍경은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잠시 겹쳐집니다. 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해야 했던 젊은 세대의 이야기인 이 소설은, 전쟁의 경험이 그들을 완전히 파괴해갔던 과정을 상세히 적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간교한 말로 자신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던 어른들을 보며 주인공은 절망과 환멸을 느낍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내린 결정은 독자에게 그리 놀랍지 않게 느껴집니다. 그에게 다시 평화로운 가정으로, 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방과후 전쟁활동>에서 사지로 내몰렸던 학생들은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킨 국가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나 저항도 표시하지 않습니다. 보상되었다고 보기엔 미미하고, 해낸 일이 작다고 보기엔 너무 위험한 일을 감당했는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전쟁에서의 모든 경험들은 그저 전선에 뛰어 든 학생들에게만 남습니다. 그들이 본 풍경, 겪어야 했던 고통, 아픈 상처들은 오로지 그들만의 것입니다. 물론 이 설정이 아주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상황의 절박성, 재난의 중대성을 고려할 때, 한 명의 소총수라도 더 필요한 전장의 상황으로 인해 학생들까지 징집되는 것은 개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들까지 차출되어야 할 정도라면, 그리고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채 투입되어야 할 정도라면, 그건 정말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은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때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대체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해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이 정말 남아 있기는 한 건지에 대해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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