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damageovertime


글/그림: 선우 훈




재난물의 공통적인 문법이 있습니다. 재난에 직면한 주인공 일행은 생존을 위해 투쟁합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살아남지는 못합니다. (모두 생존하는 만화적인 상황은 너무 현실성이 없기에 거의 채용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일부가 성공적으로 안전지대에 도착하거나, 다음 단계로 넘어가거나, 아니면 모두 죽습니다. 따라서 핵심은 누가 얼마나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희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뀝니다. 가령 영화 <부산행>은 타인의 고통에 무신경하거나 타인을 죽도록 내버려둔 사람들을 모두 몰살시켜 버립니다. 반면 앞서 리뷰한 <방과 후 전쟁활동>에서 인물의 사망은 굉장히 임의적으로 발생하며, 이 무작위성은 전쟁물의 독특한 긴장감을 제공합니다.

좀비물인 <데미지 오버 타임>의 경우는 이러한 재난에서의 공포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다룹니다. 이 작품에서는 단지 재난이 닥쳐왔기 때문에 주인공과 그 일행이 위험에 처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정말로 위협하는 것은 공동체 내부의 권력욕입니다. 선우훈 작가는 극한 상황에서조차 작동하는 일그러진 권력에의 의지가 어떻게 개개인과 집단을 파괴하고 마는지를 덤덤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데미지 오버 타임>은 군대물이면서 동시에 좀비물입니다. 주인공은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군인이고, 그가 속한 부대는 격리된 공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좀비 사태의 피해를 면합니다. 조만간 사태를 파악한 부대원들은, 내부 조직을 재정비한 뒤 좀비와의 전투 준비에 돌입합니다. 그들은 소총과 수류탄, 크레모아 등 중화기를 이용해 좀비를 제압하며 차츰 생존 물자를 확보합니다. 

이 전개는 독자들에게 조금 당혹스럽습니다. 대체로 생존물은, 특히 좀비물은 압도적인 다수의 좀비에게 쫓겨다니는 생존자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런데 군대라는 이 집단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좀비들은 (아슬아슬하게이긴 하지만) 박살납니다. 주인공 일행이 물자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좀비물의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름, 탄약, 식량은 수십 년 동안 써도 될 만큼 쌓여갑니다. 그만큼 작중 인물들도 독자들도 좀비 때문에 죽을 거라는 긴장감은 무뎌집니다. (와중에 종종 희생자가 발생하긴 하지만 그들은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차츰차츰 발생하는 조직 내 균열 때문입니다.

좀비 사태 발생 이후 부대의 고위 간부가 다수 병력과 함께 차출되어 버렸기 때문에, 주인공의 군부대는 조직 재정비를 위해 부대를 개편하고 지휘관을 새로 선출합니다. 대대마다 서로 다른 복장을 입도록 함으로써 곧바로 구분할 수 있게 하지만, 이 구분은 머지않아 위계의 표식이 됩니다. 상급 대대의 구성원들은 하급 대대를 경멸하고 조롱하며, 이에 격분한 하급 대대의 구성원들은 단체로 항의에 나섭니다.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하사 신찬수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다시 규율을 잡으려 시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부정은 작품의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는 씨앗이 됩니다.

작가는 대대가 구분된 이후 병사들이 서로의 계급에 따라 멸시하고 조롱하는 장면에서,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미국 극작가 리로이 존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빌려서 말이죠.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 줄에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것은, 의외로 생존 자체보다는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보다 위에 서야 한다고 믿고, 그 지위를 통해 타인을 수족처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이런 지배-피지배의 경험을 늘 직간접적으로 체험하지만, 특히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은 군대입니다. 심지어 이곳은 효율성 논리를 사용하는 기업보다도 더욱 낙후된 위계질서를 사용하며, 이 점에서 더욱 원천적인 폭력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생겨나는 새로운 갈등 때문에, 독자들은 좀비를 어느 정도 제압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조차, 계속해서 불길한 상황들이 펼쳐지는 것을 보며 긴장을 놓지 못합니다.

<데미지 오버 타임>에서 인물들이 희생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저 좀비 때문만은 아닙니다.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조직의 질서를 위해 자그마한 악은 용인되어야 한다고 믿는 지배권력입니다. 이 부분에서 앞서 리뷰한 <유쾌한 왕따>와 구분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유쾌한 왕따>가 공동체 안과 밖의 경계를 긋는 가운데 발생하는 광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데미지 오버 타임>은 공동체 조직 내부의 잔혹한 지배의 논리를 주목합니다.(<데미지 오버 타임>의 공동체 밖은 어차피 좀비떼이기 때문에 안팎의 구분이 무의미하죠) 권력의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에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습니다. 경악스러운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고작 이백 명도 안 되는 작은 공동체에서, 권력은 질서라는 명목으로 위장하여 지배를 영속화하고자 합니다. 수 만 명이나 수십 만 명을 다스리는 것도 아닌, 고작 이백 명을 두고 말이죠. 어쩌면 그런 수 자체의 문제는 권력자에게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소수를 희생하여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다시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은 권력자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희생이 계속되면, 결국 남는 것은 누구일까요. 

갈등이 최고조로 발생한 이후, 살아남은 자들은 조직의 질서를 변경합니다. 그들은 지배의 방식을 포기하고 대등하고 평등한 개개인의 연합체를 꾸립니다. 물론 그것은 예전과 같은 수가 남아있지 않기에, 지배권력 자체가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권력의 일방적인 행사가 불가능해져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생존자들은 결국 부대를 떠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발대가 맞이했던 운명을 피해갈 수 있을지,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독특한 그림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은 도트 웹툰입니다. 작가는 후기에서 점을 사용해 그림을 그린 이유를 설명합니다. “저는 이러한 점들의 집합으로 사람들의 집합, ‘집단’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표현방식이 내용과 절묘하게 겹쳐지는 이 구도를 작가는 처음부터 의도했으며, 다른 틀을 고를 수는 없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구도는 언제나 인물/대상을 배경과의 연관 속에서만 보여줍니다.(작품에서 클로즈업이 사용되는 경우는 몇 장면에 한정됩니다) 한국 현대사라는 커다란 배경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는 작가의 설명대로, 도트 그림체는 개개인을 복잡한 맥락 속에서 가져오고 싶었던 작가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소결


세 작품을 재난물이라는 특징으로 묶어서 리뷰해 보았습니다. 읽으며 눈치채셨겠지만 이 글들에서는 재난물에서 재난 자체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글을 쓰며 언급했듯이, 재난이 세계의 질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크게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별로 변하지 않은 부분도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재난은 사태의 "배후로 돌아가는" 방법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복잡한 층층의 상황들 속에서 미쳐 보이지 않던 구조나 논리를, 잔혹할 정도로 선명하게 이끌어내는 도구인 것이죠. 물론 이렇게 도구적으로 볼 때 재난물-생존물의 성격을 모두 포착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작품들은 정말 생존 자체의 짜릿함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그것이 갖는 작품성이 여타의 사회적 시선을 지닌 작품과 비교하여 어떻다고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건 순수히 저의 주관적 흥미 때문에 선택된 것입니다. 

다만 이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품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본 작품들 중 유토피아를 다루는 작품 비중보다는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작품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 같습니다. 역시 갈등과 마찰에서 생겨나는 역동적인 전개가 더 생명력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토피아를 향한 상상력보다 디스토피아를 향한 상상력이 더욱 활발해진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상상력을 어떻게 조직하고 구상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가 던져진다는 점이 늘 흥미롭습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