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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돌배


대부분의 스포츠 만화는 경쟁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승부의 서사를 지닙니다. 승리/패배라는 이항 도식을 통한 성장의 서사는 스포츠물 전반에 굉장히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그렇지 않은 만화를 생각하기가 더 어려울 정도입니다. 또한 이 승부 속의 성장이라는 요소는 스포츠 만화의 핵심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배제하면 작품의 스토리가 빈약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치열한 승부와 숨막히는 경쟁의식은 종종 과다한 피로감을 안겨주기에, 때로 좀 더 삼삼한 작품을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는 그런 ‘삼삼한’ 작품입니다. 돌배 작가의 두 번째 스포츠물인 이 작품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승리와 패배라는 도식 바깥에 있습니다. 전작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에서 운동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프로그래머 이가야의 태권도 수련 과정을 보여줬다면,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서바람과 평범한 직장인 한태수가 달리는 이야기입니다. 가야가 태권도 대회 우승을 목표로 하지 않듯이, 바람도 마라톤에서 승리하기 위해 달리지 않습니다. 그런 ‘경쟁 없는 스포츠물’인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는 그럼에도 독자의 마음을 건드리는 힘이 있습니다. 이 만화는 달리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가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1) 달리기 - 고독한 몸의 체험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차고,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달리기 시작한 뒤 몸이 지르는 비명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이유로 운동을 시작했든 상관없이 공통적입니다.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의 주인공 한태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미없는 사람이라며 애인에게 차이고, 자신의 퉁퉁한 몸을 보며 실의에 빠진 그는, 친구 서바람이 달리는 모습을 보며 문득 새로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자신도 달리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달린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후회합니다.



달리는 사람은 조만간 깨닫습니다. 그를 대신해서 남은 거리를 아무도 달려주지 않습니다. 차오르는 숨도 근육의 통증도 온전히 자신만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달리는 사람은 외롭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에 조금씩 익숙해지면 새로운 것들이 보입니다. 스치는 바람, 땅을 밀어내는 감각,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 달리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이 새로운 세계 역시 혼자만의 것입니다. 

주인공 서바람은 이 감각에 중독된 인물입니다. 그는 하루에 10km, 혹은 그 이상씩 달립니다. 그는 이 혼자만의 세계에 익숙합니다. 한태수 외에는 딱히 친한 친구도 가까운 친척도 없습니다. 어차피 그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달리기는 오로지 혼자 하는 스포츠이니까요. 바람이 지닌 유일한 소망은 데스밸리 울트라마라톤(데스밸리 사막 100km 마라톤)에 참가해보는 것입니다. 그의 세계에는 다른 것이 들어올 여유도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2) 함께 나란히 달리기


하지만 바람은 조만간 깨닫습니다. 혼자서만 달릴 수는 없다는 것을요. 달리는 사람에게는 부상을 입었을 때 부축해 줄 사람이 필요하고, 속도를 조절해 주는 페이서가 있어야 합니다. 울트라마라톤 경험자들의 조언, 그리고 메디컬 스태프의 조력 없이는 데스밸리를 완주할 수 없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바람을 돕겠다고 다가오면서 바람의 관계망은 (태수가 놀랄 만큼) 넓어집니다. 달리기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 부상을 당했던 바람은 이들 덕분에 부상을 털고 다시 달릴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달리기 모임 멤버들이 모이면서, 등장인물들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달리는 세계를 경험합니다. 함께 달리는 것은 혼자만의 세계였던 몸의 감각을 공유합니다. 고독하게 달리는 대신 나란히 혹은 연이어 달리는 경험은 지쳐도 계속해서 달릴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습니다. 그렇게 달리기 초심자였던 태수와 훈모는 5km, 하프를 거쳐 어느새 마라톤을 완주합니다. 그리고 데스밸리라는 험난한 사막 코스를 달릴 수 있도록 함께 준비하면서, 무모해 보였던 꿈은 어느새 모두에게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3) 달리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


사막의 열기를 뚫고 달려야 하는 울트라마라톤에 참여한 이들은 다시금 깨닫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격려를 보내도, 함께 나란히 달리고 있어도, 결국 달리기는 다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타인은 어디까지나 조력자일 뿐,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어떤 속도로 달릴지 결정은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장거리달리기 선수 일레인 파커가 말하듯, 다들 같은 코스를 달리고 있기는 해도 그들은 절대 함께 달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혼자서 달리는 경험이라는 원점으로 다시 돌아온 셈입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되돌아왔다고는 해도,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자신은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의 자신과는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몸의 고통을 온전히 체험하는 혼자이지만, 함께 달리고 시간을 보냈던 타인과의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나’는 처음보다 커진 존재입니다. 사막에서 달리기를 포기하고 싶었던 훈모가 달리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 혹은 마라톤에서 혼자 달려나가던 바람이 태수와 만나 함께 달리는 것이 즐거웠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달라진 내가 경험하는 세계도 처음과는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50km를 달린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계는, 달리지 않은 사람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물론 그 새로움은 뭔가 거창한 것은 아니고, 남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70km, 100km를 달릴 미래의 나는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작품이 지닌 성장의 서사는 독특합니다. 이 서사는 다른 많은 작품들처럼 드라마틱한 갈등과 해결의 서사의 형태로 전개되지 않습니다.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에는 태수와 바람이라는 등장인물의 이름대로 그저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듯 묵묵히 달리는 장면만이 이어집니다. 그 장면들 속에서 인물들에게 보이는 세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통해 인물들의 성장이 드러납니다. 압축적으로 서술된 이 과정은 사실 무척 지난한 시간입니다. 그 속에서 쌓아올려지는 단단함이 무엇인지, 돌배 작가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전작 <샌프란시스코 화랑관>과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에서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이야기들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주인공이 성장하는 모습이 묘사되었다면,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에서는 주인공 바람과 태수의 관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 위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진행된 2018 만화비평 공모전에 제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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