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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lezhin.com/ko/library/comic/ko-KR/mangoseed


글: 골드키위새

그림: 넋부자들


* 작품의 핵심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론


‘망고의 뼈’라는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13화에서 작가는 암시를 던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함소복은 어렸을 때 망고 안에 들어있었던 것이 망고의 뼈라고 생각합니다. 뼈가 아니라 씨앗이라고 주변에서 말해도, 소복은 계속 그것이 뼈라고 우기며 버텼지요. 하지만 소복의 아버지는 소복이 그것을 뼈라고 부르도록 놔둡니다. 나중에 왜 그랬는지 아버지에게 물어보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니라는 걸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될 텐데, 스스로 틀린 것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졌으면 했다고 말입니다.

<망고의 뼈>는 네 사람의 소녀/소년, 즉 함소복, 유리사, 백주율, 백주인의 성장물입니다. 그들은 각각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망고의 뼈’를 마주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일견 가벼운 연애물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그러나 무척 무겁고도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급적 이 주제에 대해 스포일러하고 싶지 않았지만, 리뷰를 위해 본문에 포함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가장 완벽한 세계라는 믿음


기독교의 수용 이래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신은 세상에서 가장 전지적이고 전능하며 지선한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가 세상을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세상은 가장 질서잡히고 올바른 형태로 만들어졌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계의 매 순간은 신에 의해 의도되고 계획된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최선의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신을 전지전능하며 지선한 존재로 파악한 사유전통에서는, 이처럼 피조물로서의 세계 역시 가장 질서잡힌 방식으로 파악해 왔습니다. 이는 근대철학에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이라는 사유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예정조화설에 따르면, 세계를 이루는 최소의 단위인 ‘모나드’는 비록 서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들 전체가 가장 최상의 질서를 이루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근대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이런 생각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의 소식을 듣고, 세계가 최상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런 커다란 무질서와 혼란, 고통이 있어야 하는지를 의문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캉디드>라는 소설을 통해, 예정조화설이라는 이론이 현실에서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함소복과 백주인이 읽었던 것처럼, 주인공 캉디드는 온갖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겪습니다. 그리고 스승 팡글로스의 가르침, 즉 우리가 세계는 가장 최선의 세계라는 가르침을 점점 믿지 않게 됩니다.

세상이 가장 질서잡힌 방식으로 주어져 있다는 발상은 무척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가 공정하거나, 혹은 공정해야 한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형태로 널리 공유되어 있습니다. 경쟁의 룰을 지킨 채 승리하는 것이 가장 공정성을 잘 보장한다는 이 믿음은, 과연 경쟁 구도 자체가 공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맹점을 갖습니다. 모범생 백주인은 이를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주인은 경쟁과 노력을 통해 승자가 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는 노력해서 실패해 본 적이 거의 없으며, 그 때문에 노력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쌍둥이 주율이 아버지에게 혼나는 것을 보면서 주율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거나, 행실이 불량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주인은 노력했는데도 그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거나, 혹은 노력 자체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을 수도 있다는 경우를 아예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런 주인의 사고방식을 산산조각낸 인물이 바로 학교에서 만난 불량아 유리사입니다. 처음 그녀를 만난 주인은 그녀의 행태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수업 시간마다 자고,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심지어 학교에서 담배까지 피웁니다. 주인은 그런 그녀를 ‘계도’하고 싶어하고, 나아가 가정 불화가 있어 보이는 그녀를 위해 가족사에 개입하려 합니다. 함소복은 그런 주인에게, 그 의도야 어쨌든 주인의 노력이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라며 주인을 말리려 하지만, 주인은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진실과 마주한 백주인은, 캉디드가 그러했듯, 자신의 낙관주의적 믿음이 박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은 결코 완벽한 세계가 아니었고, 감히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생존자의 이야기




유리사는 친족 성폭력 생존자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그녀는, 그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이후부터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유리사의 어머니는 사라졌고, 아버지는 감옥에 들어갔으며, 그런 아버지를 옹호하는 할머니가 친권자라는 상황에 반발하며 가출을 반복하다가, 결국 집을 나와 어머니의 친구 집에 얹혀 살고 있습니다. 

유리사는 단지 경제적 빈곤 때문에만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자신의 곁에 있어줄 사람이 적다는 사실입니다. 주변 친구들은 자신의 상황을 모른 채 불량아라고 뒷담화하기에 바쁘고, 선생님들 역시 그런 낙인 때문에 그녀에게 가혹하게 대합니다. 유리사는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그들에게 구구절절 털어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말하는 것 자체로 무척 힘든 경험입니다. 함소복은 몇 안 되는,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친구입니다. 소복에게 고백하려는 백주인에게 리사가 죽일 듯이 달려드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단 한 명의 친구를 연애로 뺏기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리사가 가진 ‘망고의 뼈’는, 그녀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뒤 암매장당했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그 믿음의 사실 여부는, 유리사의 주요 행위동기이기는 하지만,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더 초점이 맞추어지는 부분은 그녀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유리사가 어렸을 때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불량아로만 취급합니다. 유리사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는 동네 사람들은, 그 사건이 잘못된 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렇더라도 리사가 다시 정상적인 가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리사가 아무리 말을 하고 화를 내도 사람들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주인은 왜 리사가 툭하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들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주변을 바라보는 주인의 세계관은 크게 바뀝니다.

사람들이 리사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리사가 ‘피해자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잘못이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나아가 그 가해 사실을 두둔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있음을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 당당함 때문에 리사는 제 아비를 무고하게 감옥에 집어넣은 ‘꽃뱀’ 취급을 당합니다.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 즉 움츠리고 숨으며 침묵하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입니다. ‘정상적인 가정’, 즉 부모와 자녀가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양육 환경이라는 믿음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할머니는 이 믿음 때문에 리사의 호소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제도적 장치 역시 이런 가정을 전제합니다. 당사자의 의견과는 무관하게 리사의 친권이 가해자에게 넘어가버리는 상황은, 이러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실체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리사는 자신을 피해자로만 정체화하지 않습니다. 즉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되돌릴 수 없을만큼 파탄나버린 것이 아니며, 그녀는 그 경험을 뒤로 하고 다시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리사는 당당하며, 언젠가 독립할 수 있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생존자입니다.


결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곁을 지켜준 사람들


이처럼 가정도, 제도적인 지원도 버팀목이 되어줄 수 없었지만, 만약 리사가 조금이라도 다시 행복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소복과 주인, 주율을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의 지지 덕분일 것입니다. 



<망고의 뼈>에 등장하는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은 함소복입니다. 이는 단지 소복이 너무 침착하다거나, 혹은 착하다거나, 아는 게 너무 많아서가 아닙니다. 주변 인물들이 모두 ‘성장하는’ 캐릭터들인 반면, 어떤 의미에서 소복은 시작부터 거의 완성된 인격의 인물입니다. 물론 이는 인권변호사 아버지를 둔 설정 덕분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이런 캐릭터 설정으로 인해 이 작품에서 늘 그녀는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녀는 성폭력 피해자인 유리사에게 전적인 지원을 제공하며, 나아가 친구로서 늘 그녀의 옆을 지킵니다. 저는 이 부분이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작가의 목소리를 투영한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누군가가 성폭력 피해를 입었을 때,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소복을 통해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입니다.

지인 중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가 제게 준 편지에 이런 문구가 있더군요. 조금 길지만 옮겨보겠습니다.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고통으로만 귀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곁을 지켜준 믿음직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어느 생존자의 말이 떠오른다. 믿을 만한 관계가 곁에 있을 때, 숱한 두려움 속에서도 비로소 ‘내가 나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어.” 


믿을 수 있는, 자신을 지지해 주며,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고통을 딛고 일어날 기회를 얻습니다. 세상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서로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습니다. <망고의 뼈>가 보여주었듯이 말입니다.


* 위 글은 SICAF 2020 웹툰평론 공모전에 일부 수정되어 제출되었습니다 (제출일: 2020년 9월 12일 오후 11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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