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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을 써 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몇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제대로 글을 맺은 적은 없습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내린 결론은, 인문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묶어서 이야기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인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세부적으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낫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유 작가님의 <지금은 삽질 중>은 ‘인문학에 관한’ 이야기, 더 정확히는 고고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님의 세 번째 장편인 이 작품은, 고고학과 학부생 이하얀의 파란만장한 학부생활 이야기입니다. 전작 웹툰 <인챈트 나람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거대한 악의 조직과 맞서 싸워야 했었지요. 과연 <지금은 삽질 중>에서 이하얀은 어떤 음모에 맞닥뜨리게 될까요? 하얀은 다가오는 난관을 잘 이겨낼 수 있을까요? ...라는 것은 사실 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고, 그보다 <지금은 삽질 중>은 하얀의 자기성찰적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나는 왜 뙤약볕 아래서 땅을 파고 있는 걸까? 왜 고고학 공부를 하고 있을까?




쓸모없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순수학문 전공자들은 그거 공부해서 나중에 어디 써먹어?라는 질문을 늘상 받습니다. 이하얀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하얀의 경영학과 남자친구는 계속해서 전과를 권하며, 하얀이 왜 그런 “쓸모없는 공부에 시간을 허비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일종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런 세간의 모멸적인 시선에 맞서 순수학문 전공자들은 자신이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인지를 밝히며 방어막을 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 자신도 이게 왜 의미있는 것인지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딜레마를 성공적으로 처리하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전과하거나, 혹은 정말 공부 자체에 너무 빠져들어서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밖의 거의 대부분 일반적인 전공자들은 이 문제를 피해가지 못합니다.

주인공인 이하얀 역시 마찬가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하얀은 고고학 공부가 딱히 싫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설아, 현민이나 세영처럼 고고학 자체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하얀은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불러 술 마시며 푸념을 늘어놓곤 하지만 딱히 그런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 푸념만 늘어놓는 자신이 부끄러운 하얀에게, 세영은 고고학의 의미를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전작 <얼룩말>의 우민 역할을 하는 게 세영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대체 수백, 수천 년 전 (혹은 수만 년 전) 유물을 공부하는 게 대체 왜 필요할까? 그게 왜 중요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하얀에게, 세영은 자기이해는 오직 고고학적인 탐구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그리고 그런 자기이해가 어떤 중요성을 갖는 지를 설명해줍니다.

하지만 고고학 공부가 그런 중요성이 있다고 알려준다 한들, 곧바로 그것에 관심이 생기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 먹고 사는데 정말 필요없어 보이는 이 공부를 계속 해 봐야겠다는 생각은 누가 넣어줘서 생기지 않습니다. 어차피 고민의 연쇄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나는 정말 이걸 좋아하는 게 맞을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라는 물음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그 문제들에는 결정적인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고민들을 잠시라도 뒤로 물릴 수 있는 건 대체 뭘까요? 13화에 묘사되는 것처럼, 다소 즉흥적이라 어이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일순 스쳐가는 시원한 바람’입니다. 이걸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라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분야는 다르지만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해 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해소되지 않는 고민들을 조금씩 밀쳐내며 나아가는 것, 가능한 일은 사실 그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다르게 만듭니다. 하얀은 전과 대신, 당분간은 학과 공부에 전념하며 유물 조사 연구 장학생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림자 너머의 이야기


<지금은 삽질 중>의 전반부가 하얀의 내적 고민에 대한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선택에 따른 그림자의 이야기입니다.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던 중 하얀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하얀이 유물 조사 연구 장학생이 되기로 결정한 이후, 그 ‘이상한 것’은 정말로 큰일이었다는 게 밝혀지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치닫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던 노력은 매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 결국 누구도 원하지 않던 방식으로 해결이 나고 맙니다. 

결국은 다시 삽질로 귀결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고민들을 넘어 힘들게 결정했지만, 사실 그렇다고 해서 난관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고민들은 다시 되돌아옵니다. 잊었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현실감이 돌아오고, 어느 순간 힘든 시간들이 앞에 마련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 보이지 않던 그림자들이 드러납니다. 내가 하고 있는 건 그냥 삽질하는 게 아닐까? 아무도 안 알아주면 어쩌지? 나를 걱정하는 내 주변 사람들은 어떡하지? 내가 돌봐야 하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런 고민들은 내 앞에 가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아무런 난관 없이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 같은 교수들도, 집이 부자라 별다른 고민 없이 살았을 것 같은 동기들도, 알고 보면 자신의 선택에 따른 대가들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단지 삽질을 하느냐 마느냐만이 아닙니다. 삽질을 하면서 그 숱한 고민들로부터 나를 지켜가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그림자에 삼켜지지 않기, 흑화되지 않고 굳건히 살아가기야말로 삽질하는 사람들의 제1계명인 것입니다. 그림자에 삼켜진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속임수로 명예와 부를 얻어내는 사람들을 우리는 끊임없이 목도합니다. 특히 대학사회처럼 폐쇄적이면서 위계가 공고한 곳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필요한 것들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합니다: “삽질하는 중에도 즐거운 일을 찾는 것”, 내 곁에서 나를 응원해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찾는 것, 그리고 설령 “이 바닥 아래에 내가 찾는 것이 없을”지라도 실망하지 않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마음가짐들을. 




결론


그리 밝지 않은 리뷰를 읽으신 분들은 느끼셨겠지만, 결코 밝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주제는 가벼울 수도 밝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진지하다고 해서 재미없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자유 작가님의 유머 감각은 여전합니다. 작은 스포일러 하나를 덧붙이자면, 결론부에서 세영이 하얀과 이어질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는 게 작은 불만이긴 합니다. 

글을 다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 문제의식들은 꼭 순수학문 전공자들만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잘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 고민들 속에서 흑화되지 않고 나를 온전히 지켜나가는 것의 중요성. 이 이야기들은 언제나 흥미롭고도 중요한 것일 테지요. 그런 생각거리들을 잘 전개하며 완결지은,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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