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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스포일러 있습니다)



https://www.lezhin.com/ko/comic/dbd/p1


글/그림: 지애


시놉시스

<심해의 조각들>의 남주인공 반기해는 극단적인 커뮤니케이션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 유명한 연기자였으나, 모종의 사건 이후 모르는 타인과 대화를 할 수 없는 장애를 갖게 됩니다. 정신과 치료도 약물치료도 소용이 없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증상을 치유해줄 수 있는 인물(권무진)을 만납니다. 


흔히 커뮤니케이션은 과녁에 화살을 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이 이해방식에 따르면, 전달할 내용(화살)을 수신자(과녁)에게 전달하려 노력하는 과정이 커뮤니케이션이며, 화살이 과녁에 꽂히면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상황들을 생각해보면 이 직접적이고 단순한 이해는 곧바로 한계에 직면합니다. 이 비유를 그대로 가져온다면, 오늘날 우리는 종종 누군가가 화살을 쏠 생각도 없었는데 화살이 날아가서 과녁에 맞는 경우를 봅니다. 혹은 한 사람의 활시위에서 수 백, 수 천, 수 만 개의 화살이 날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과녁에 맞았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수 만, 수 억 명의 사람이 하나의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기도 합니다. 이처럼 현대적 커뮤니케이션은 과거의 일대일 모델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에 놓입니다. 이 상황은 골치아픈 문제들을 던져줍니다. 누군가는 생각지도 못한 화살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며, 반대로 그것을 쏘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상처들은 누구의 탓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 것일까요.


(1)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의 공포: 반기해의 경우


반기해의 증상은 아픈 기억과 맞물려 있습니다. 기해는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가 어린 시절에 수많은 대중들의 원색적인 말들 앞에 무방비로 노출됩니다. 그는 그 말들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모른 채 혼자 무력하게 그 화살들을 맞습니다. 깊은 내상을 입은 그에게, 모르는 타인의 말은 그를 괴롭히는 악령이 됩니다. 그 말의 내용도, 의도도, 그 무엇도 상관없습니다. 즉 반기해의 상처는 타인의 선의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 이전의 문제입니다. 익명의 화자들 속에서 인격을 말살당하는 경험을 한 반기해는 이미 타인의 존재 자체만으로 공포를 느낍니다. 때문에 그에게는 늘 자신이 모르는 타자, 즉 익명의 발화자들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그 공포는 타인의 발화가 (과거 그가 들은 폭언들의) 무정형적 형상으로 변형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반기해가 극단적으로 느끼는 이 공포는 우리 모두에게 어느 정도 공통적입니다.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할 때의 대화 참여자는 언제나 심해 속의 잠수사들과 같은 불확실성을 갖고 출발합니다. 대화할 상대방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내용을 꺼내들지, 혹은 어떤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무런 정보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불확실성은 대화를 이어나가게 하는 힘이기도 하지만(만약 서로 무슨 말을 할지 모두 안다면 대화가 애초에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의 범위가 전례없이 확장된 오늘날 이 공포는 어느 때보다도 확대됩니다. 유명인들이 종종 SNS를 운영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이슈와 관련되어 설화를 치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많은 대화 상대자들 속에서 누가 어떤 이유에서 무엇을 문제시할지 모두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될 때, 혹은 그로부터 너무 큰 상처를 입을 때, 우리는 모두 반기해처럼 대화의 창구를 닫고 숨어버리는 쪽을 택합니다.

물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커뮤니케이션을 거절할 수 없으며, 많은 경우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을 넘어 혜택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반기해는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의 단순한 피해자만은 아닙니다. 그는 수많은 대중에게 송출되는 매스미디어에 의해 유명세를 얻고 가족을 부양할 (그래서 어린 시절의 불우한 생활을 마칠) 수 있게 된 수혜자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매스미디어는 손쉽게 그를 패륜아로 낙인찍고 매장시켜버릴 수 있게 한 철퇴이기도 했지요. 반기해는 그래서 익명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힘과 이중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꼭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에게 악담을 퍼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반기해는 미디어에 참여하는 대중들이 그 미디어의 힘을 고려하며 조금 더 책임감 있게 말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후 진실이 밝혀질 때 대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화살이 과녁에 명중했을 때, 과녁이 정말 맞아야 해서 맞은 건지, 화살이 잘못 쏘아진 건 아닌지, 딱 한 번이라도 의심해주면 좋겠어요. 그 작은 의심이 누군가에겐 일어날 수 있는 의지가 될 수 있거든요.”(<라스트 왈츠>(4))

반기해는,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에서 조금만 더 신중해지기를, 그리하여 미디어에 보이는 대로만 믿고 별 생각 없이 쏴댄 말이, (자신의 경우처럼) 누군가의 삶을 산산조각낼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반기해-김후 사건의 전말이 모두 밝혀진 뒤에도 사람들은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화살의 과녁이 바뀌었을 뿐이지요. 반기해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습니다. 주하준의 말대로, 사람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은 타인에 대한 어떤 진지한 생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가는 수많은 바람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더블 트라이앵글>(4))


(2) 비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의 슬픔: 권무진과 주하준의 경우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이 공포인 것은 단지 상대방이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익숙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수렁에 빠지는 것을 자주 목도합니다. <심해의 조각들>의 또다른 주인공인 권무진과, 그 남자친구 주하준은 이처럼 비익명적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심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인물들입니다. 


1) 권무진은 반기해를 폐쇄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권무진은 반기해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함께 있을 때면 반기해의 증상을 완화시켜주는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기해는 도움을 받던 도중, 권무진에게도 마음 한켠에 드러나지 않는 깊은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권무진은 자신의 (사실 자신의 것은 아니었던) 욕망을 무리하게 고집한 탓에 온가족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기억으로 커다란 죄책감을 안고 있습니다. 파국의 잔해들 위에 서 있는 권무진은 과거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그 어떤 감정도 분출시키지 않고 억누르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진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욕과 자신이 누려야 하는 불행을 별다른 불평 없이 묵묵히 떠안습니다. 

하지만 반기해와의 대화를 통해, 권무진은 속죄하겠다는 자신의 자세가 사실은 더 상처받기 싫어 취했던 방어적 자세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태도 뒤에서 진짜 문제를 회피해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권무진은 가족들과 한 명씩 마주앉아 마음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말들을 꺼냅니다. 그리고 이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생각지 못한 결과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한 공간 안에서 늘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들은 한 번도 제대로 대화한 적이 없었습니다. 과거의 상처에 대한 자책과 원망이 섞인 채 각각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자기애적-폐쇄적인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대화는 진척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권무진이 자신의 아픔을 둘러싼 기억들과 생각들을 터놓고 드러내자, 상대방의 아픔 역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비로소 서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나타납니다. 때로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할 만큼 커다란 공포는 그저 피상적인 대화만을 이끌어내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는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권무진은 반기해로부터 새삼 이를 자각합니다. 자신 안에 묻어서 끝낼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그리하여 다시 꺼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물론 오랜 시간 묻어두었던 것을 꺼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상처들 속에 헤집어야 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문제를 마주하기 위한 용기와 결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권무진의 용기는 타인의 아픔을 쓰다듬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무진은 감정을 억눌러왔지만, 억눌린 감정도 반대로 자신을 억눌러왔습니다. 그런 무진에게 기해는 감정의 둑을 열게 한 열쇠였습니다.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게 안으로 쌓이다 보면 언젠가 한계가 와요. 한계가 오면 괴로워져요. 엄청나게. 그래서 난 배출구를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그쪽도 나를 그렇게 써 봐요.”(<사랑은 파랑>(4)) 그렇게 감정을 흘려보내기 시작한 무진은, 비로소 가족뿐만 아니라 과거의 자신까지 조금은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2) 주하준은 매우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아마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엄친아에 가까운 캐릭터일 것입니다. 그는 단지 똑똑할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갖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준은 여자친구 권무진과, 무진에게 호감을 보이는 반기해에게도 많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런 주하준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않는 마음 속 슬픔은, 아버지의 배신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어머니를 채 잊기도 전에 아버지가 지금의 새어머니와 재혼했다는 이유에서, 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아버지 역시 하준의 그런 태도를 못마땅해합니다. 

작품 후반부에서,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이 관계가 하나의 사소한 (그리고 중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하준은 알게 됩니다. 하준과 아버지는 서로 무언가를 감추거나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서로에게 사실만을 말했고 그렇기에 오해가 일어날 일은 없었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아버지는 자신의 진심이 선명하게 하준에게 받아들여졌으리라고 기대했고, 반대로 하준은 아버지의 속마음을 놓치지 않고 있다고 착각했던 데 있었습니다.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착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투명하게 읽지 못합니다. 마음은 오직 간접적으로만 해석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표현해야 하고, 그 표현은 늘 오해되거나 닿지 않을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대화 역시 그 위험성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준은 뒤늦게 오해를 깨닫고 관계에서의 뒤틀림을 바로잡지만,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함께 본 것을 함께 공유하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대화의 새로운 주제가 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함께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기도 합니다. 서로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을 때,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이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지는 광경들을 발견합니다. 투명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화들은 때때로 사실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어둠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가장 가깝고 친밀하다고 믿어졌던 관계야말로, 많은 경우 커뮤니케이션의 심해가 됩니다.


(3) 심해에서 밖으로: 사랑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력한 서사는 사랑입니다. 반기해-권무진-주하준 사이의 애정 관계는 작품의 전개를 긴장감 있게 이끌어갑니다. 이 관계 속에서, 사랑은 각자의 마음 속 깊은 어둠을 끌어낼 수 있을까요. ‘심해의 아이들’은 사랑을 통해 수면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요.



인물들은 두 가지 유형의 사랑의 서사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책임과 의무로부터 오는 애정입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상대가 고생했으니 그만큼 응분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열정으로부터 생겨나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본 순간부터 애정에 사로잡혀, 도저히 그 사람 외의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수가 없는 형태의 사랑 말이지요. 이 두 가지 형식 모두에서,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상대방을 웃게 해주고 싶어하고, 행복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길 원하지요. 하지만 두 애정의 서사에는 근본적인 메커니즘 차이가 있습니다. 책임에 방점을 찍을 때, 중점은 ‘안정’에 놓입니다. 상대방이 지속적인 안정 속에서 차분히 행복을 누리는 것, 그리하여 고통을 줄이는 것이 핵심입니다. 주하준과 권무진은 이런 자세를 견지합니다. 이들의 연인관계는 상대방의 행복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연애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랬지요. 무진과 하준은 이 사람의 마음을 지금 받아줘야 하는 이유, 혹은 지금 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고려할 때, 어떻게 하면 상대가 상처받지 않을지부터 고민합니다. 반면에 반기해의 열정적인 사랑은 훨씬 저돌적입니다. 그가 상대방과 가까이 있고 싶어하고, 급기야 좋아한다고 말해버리는 것은,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힐 것 같기 때문”입니다. 

<심해의 조각들>에서 전개되는 긴장은, 여타의 작품처럼 등장인물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이 두 가지 유형의 사랑의 의미론이 충돌하는 데에서 빚어집니다. 가령 주하준이 반기해에게 슈만-클라라-브람스의 관계를 들려준 것은, 단지 열정적인 애정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클라라에 대한 브람스의 격정보다, 슈만과 클라라 사이의 깊은 신뢰에 토대한 애정이야말로 서로에게 더 오랜 울림을 주는 관계로 남았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두 가지를 언급해야 합니다. 첫째, 두 가지 유형의 사랑의 서사가 충돌할 때, 근대 이후 탄생한 열정적 사랑의 승리는 (적어도 근대 이후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는) 일반적입니다. <심해의 조각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변 인물에 대한 부채감이나 의무감으로 억눌려 있었던 인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마음껏 울고, 그리하여 진정한 웃음을 찾는 과정이 전개됩니다. 이 서사는 근대 이후의 전통적인 낭만적 사랑 개념을 충실하게 따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첨예하게 형성된 삼각관계가 결국 끝날 때, 이는 어떤 인물의 감정이 단지 더 진실되거나 더 컸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결정적이었던 것은 서사 자체의 힘이 더 강했는가에 있습니다. 둘째로, 그렇지만 이러한 서사적 충돌 과정에서 어느 한편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준/무진, 그리고 기해는 각각 책임감있는 사랑과 열정적인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형식을 따르지만, 서로의 생각을 점차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기해는 사랑에서 자신의 마음만큼이나 상대의 마음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브람스가 그러했듯이 자신도 이 관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반대로 하준은 자신의 의무감섞인 애정이 상대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준 것인지 자문합니다. 그리하여 기해와 무진, 무진과 하준은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기해와 하준도) 점차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 ‘커뮤니케이션의 심해’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불행의 흔적들을 뿌리치고, 행복을 찾기 위한 길을 떠납니다.

결국, 사랑의 서사는 이 작품에서는 동시에 구원의 서사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감정의 고양을 통해 불행했던 이들이 행복해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또다른 커뮤니케이션 양식은 그들이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것을 꺼내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물론 작품에서 이 과정은 다소 낙관적으로 그려진 측면도 없잖아 존재합니다. 과거의 상처를 꺼내는 것이 상처를 더 키울 뿐인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시도에서 더 커질 수 있는 상처보다, 오히려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서로 몰이해 상태에서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에 더 방점을 찍습니다. 사랑에 어떤 힘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마음 속에서의 기쁨 그 자체가 아니라, 서로에게 용기를 줌으로써 눈앞의 심해로 뛰어들 수 있게 하는 힘이라는 게 작가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4) 결론: 사실과 진실 사이의 역설


반기해는 ‘진실’을 밝혀서 자신을 도와주려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고 믿고 싶어하는 게 진실이 되던데요. 그 진실은 권력이 되고요. 나는 그 진실이라는 게 너무 너무 무서워서 미칠 것 같거든요.” 기해에게 ‘사실’이란 “농도가 다른 회색들이 얽힌 것”인 반면, ‘진실’은 “완벽히 분리된 권력의 흑백”입니다.(<어쩔 수 없는 것>(2)) 우리는 많은 사실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그 가운데 몇몇 진실들을 믿으며 나아갑니다. 사실은 우리 앞에 그저 놓여져 있는 것, 그리하여 수많은 해석들과 시각들이 공존하는 영역입니다. 사실은 해석 속에서 어떻게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고정시켜버리는 권력이 작동하는 순간, 더 이상의 해석의 여지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흑백의 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눈앞의 ‘진실’에 다시금 새로운 잣대를 들이미는 시도를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그 ‘진실’이 정말 이견의 여지가 없는지, 어떤 회색의 지대가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다시 한 번 커뮤니케이션에 뛰어드는 용기를 요구합니다. 반기해의 경우, 결국 과거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이밀어 사회적인 낙인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무척 역설적인 일이지만, 커뮤니케이션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것입니다. 반기해와 권무진에게 이러한 극복은 사랑의 힘을 통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꼭 사랑만이 이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힘은 아니겠지요. 오늘날 우리가 심해를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그런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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