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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내용 스포일러 있습니다)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3453&no=1&weekday=sat


글/그림: 한나


시놉시스

제사장의 마을 ‘소도’에서 나와 사람들의 점을 보며 떠도는 생활 중인 소녀 ‘모아’의 이야기


저는 네이버 웹툰에서 ‘제사장’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만화를 두 개 보았습니다. 하나는 자유 작가의 <인챈트-나람 이야기>, 다른 하나가 바로 <묵회>(默會)입니다. 두 이야기에서 ‘제사장’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바는 조금 다릅니다. 전자에서 제사장은 사물에 힘을 불어넣는 존재로 등장한다면, 후자에서 제사장은 예언자의 역할을 합니다. 물론 둘 다,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인간세계와 접촉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인챈트-나람이야기>는 좀 더 나중에 리뷰를 할 계획입니다.) 정말 대략적인 구도만 간추려 말하면, 이 만화는 예언자인 주인공 모아가 ‘소도’를 나와서 떠돌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묵회>의 주인공 모아는 사람들에게 점을 봐 주며 살아갑니다. 모아는 사람들이 가져오는 온갖 시시콜콜한 고민거리에 대해 조언을 제공합니다. 때로는 손님이 너무 없어서 쫄쫄 굶기도 하고, 너무 많아서 하루종일 점을 봐 준 다음 졸려서 뻗기도 합니다. 그런 모아에게, 초반부부터 시비를 거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모아가 해 주는 게 단순히 말장난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미드 <멘탈리스트>의 제인이 하듯이, 사람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대략적인 특성을 파악한 뒤 적당히 맞는 말을 꺼내는 것이라고 말이죠. 제인의 경우처럼, 실제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점쟁이’들을 몽땅 사기꾼으로 몰아붙이기엔, 조금 찜찜한 측면이 있습니다. 점쟁이들은 인류 역사에서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직면합니다. 이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게 좋을지, 유학을 가도 되는 것인지, 사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등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한 결정 말입니다. 이 결정들은, 생의 일회적이고 비가역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인 것이 됩니다. 우리는 그 결정이 올바른 것인지, 정말 최선의 것인지를 늘 따져보고 싶어합니다. 다른 결정과 대조해서 무엇이 더 나은지를 쭉 나열해 비교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 결정이 내려졌을 때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리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프루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간 사실을 뿌듯해하거나 후회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가지 않은 길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불확실성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운명’을 직관하는 이들에게 의존합니다. 그들은 점쟁이, 예언자, 무당, 초능력자 등등 다양한 방식으로 불립니다. 이들은 세상사의 흐름을 조망하고, 그로부터 선택의 귀결을 충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역할은 무척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집단이 종교적 의식을 시작한 이래 샤먼은 언제나 공동체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인간세상과 초자연적 영역을 매개mediate하는 중간적 존재자medium입니다. 제례를 통해 이들은 초자연적 존재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반대로 인간들의 바람을 초자연적 존재에게 전달하기도 합니다. 전자로는 모세가 십계명을 전달받는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고, 후자의 대표적인 모습은 기우제겠지요. 이런 중간자적 존재인 예언자는 언제나 외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들의 생사가 걸린 중요한(때로는 무시무시한) 일을 다루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중간적 존재들은 늘 환영만 받지는 않습니다. 환영받지 못하는 말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묵회>의 모아는, 2화에서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온 인물에게 대답합니다. 자신은 인간사를 결정하거나 혹은 결정된 인간사를 읽어주는 게 아니고, 그저 ‘조언자’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짐을 듣고, 그 고민에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이 예언자의 일이라는 것이죠. 사실 이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닙니다. 우선 반쯤 맞는 대답인 것은, 모아가 어떤 점을 봐 주더라도 결국 선택은 듣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선택의 순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해주는 모아의 조언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하는 자의 내면 깊숙이에 있는, 본인도 미처 몰랐던 속마음인 순간들이 있습니다. 때로 모아의 조언은 그 속마음을 들려줍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신은 조언자일 뿐이라는 대답이 완전히 맞지는 않습니다. 작품 내에서 언제나 유유자적하며 평온한 표정이던 모아가, 완전히 일그러진 표정으로 도망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타인의 죽음을 직면해야 할 때입니다. 어떤 노력을 해도, 무슨 조언을 해도 극복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을 때, 그리하여 점을 보러 온 사람에게 그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 거라고 예언해야 할 때, 모아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모아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물론 죽음은 모든 사람의 공포이겠지만, 그것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예견해야만 하는 예언자들에게도 그것은 커다란 공포일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정말로 결정적인 운명을 봐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제시된 죽음의 순간처럼 말이지요. 그것을 어떻게 전달해 줄 것인지는 이 중간적 존재들에게 언제나 숙제입니다. 샤먼들이 외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기대하는 제의를 제대로 치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아의 스승이 바로 이런 문제로 공동체로부터 쫓겨나 다시 소도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모아 역시 스승과 같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타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전해야 하는 과제는 모아에게 너무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모아는 의뢰인에게 점을 제대로 봐 주지 못하고 도망가지만, 결국 의뢰인이 소중한 사람과 제대로 작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돌아옵니다. 이 점에서 모아는 그녀의 스승이 하지 못했던 커다란 숙제를 해냅니다. 죽음과 같이 비극적인 순간이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에 대처할 마음을 먹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예언자의 과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모아는 깨닫습니다.

이 점에서, 이 이야기는 단지 모아에게 점을 보러 온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의뢰인들만이 선택을 하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예언자 자신도 선택을 합니다. 모아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선택지가 주어지는 것을 깨닫고, 때로는 자연스럽게, 때로는 겁에 질려 도망가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주어진 선택지를 받아듭니다. 그리하여 모아는 다시 소도로 귀환합니다. 그러나 돌아온 모아는, 어렸을 때처럼 죽음에 대해 마냥 공포스러워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묵묵히 수행합니다. 마치 그렇게 되어야 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默會’라는 말 뜻대로, 여정을 통해 모아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돌아왔던 것입니다.


소결

<묵회>는 완결까지 약 100화 정도로, 그리 길지도 그리 짧지도 않은 길이입니다. 스토리의 전개가 딱히 늘어지지도 않고 너무 짧지도 않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모아의 이야기를 더 보고 싶었기 때문에 완결되었을 때 다소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정도가 가장 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적절함의 미는 한나 작가의 후속작 <차차차>에서도 마찬가지로 발휘됩니다. 덧붙여, 동양풍 분위기 묘사에 한나 작가의 그림체는 정말 어울려서 더 보기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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