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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팀 심우도

 

 

1. 서: 슬픔을 이야기한다는 것

작가 이자크 디네센은 “모든 슬픔은, 그것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된다는 것은 서사화됨을 의미하며, 바꿔 말하면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태의 경로를 추적하며 의미를 해명해낸다는 것이다. 어떤 슬픔과 고통도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별과 상실은 때로 아무런 전조 없이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아픔은 가장 부조리하고 이해불가능한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불행 자체에 의해서도 괴로워하지만, 그 불행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도 고통스러워한다. 사람들은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슬픔과 고통에 대한 의미화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들은 본래 의미친화적인 대상이 아니며, 더욱이 어떤 슬픔과 고통은 이해나 설명을 그다지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슬픔이 그토록 쉽게 이야기되고 견뎌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그렇게 슬퍼할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쉽게 이야기될 수 없는 대상들을 때로 우리는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 웹툰 <우두커니>의 작가들이 묘사하듯, “방에 보이지 않는 물이 차올”라서 “곧 잠겨버릴 것”처럼 경험되는 슬픔들이 있다. 비-서사적인 고통의 순간에 대한 발화는, 오직 시간을 들여 그 경험을 ‘우두커니’ 지켜본 이후에만 가능하다.
<우두커니>는 화자 ‘승아’가 알츠하이머병 환자였던 아버지를 간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자서전적 이야기이며, 나아가 문득 찾아온 고통을 수용하는 경험을 기록한 작품이다. (1) 이 기록은 고통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이라기보다 담담한 자기관찰적 서술이다. 화자는 변해가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이를 통해 조금씩 소실되는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면밀히 기록한다. (2) 우리는 타인의 돌봄에 대한 이 기록 속에서 돌봄노동의 본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되며, 무엇보다도 그 관계적 특성들을 재발견한다. 

2. 고통을 기록하기: “어느 날, 아버지에게 치매가 왔다”

이 작품은 알츠하이머병 환자인 아버지에 대한 간병기이다. 프롤로그에서 이 사실을 덤덤하게 서술하면서부터, 간병인이었던 화자는 환자의 변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모습을 기록한다. 인상적인 것은 사태의 서술에 사용되는 극도로 절제된 표현들이다. 화자는 고통을 의미화하려 시도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경험을 서술하는 작업만을 수행한다. 즉 자신이 직면하는 상황이 추상적으로 해석되는 대신 눈앞의 상황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아버지의 불평과 찡그린 표정, 작가와 배우자의 한숨, 아버지와 함께 한 산책길의 바람, 병원에 다녀오던 순간의 적막, 아버지와 다툰 뒤 누워서 흘리던 눈물 등. 담담하게 지속되는 기록의 감정적 여백은 독자들이 작가의 이야기에 더 가까이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한다. 
화자의 감정적 과잉을 배제한 것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일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가피한 선택지이기도 하다. 이 불가피성이란, 바로 아버지가 앓고 있는 병이 근본적으로 서사적이지 않은 질병이라는 점이다. 정신과 교수 아서 클라인만이 알츠하이머병 환자였던 아내를 간병한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한 <케어Care>에서 언급하듯이 말이다.

알츠하이머는 관습적인 이야기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물론 시작이 있고 피할 수 없는 끝도 있을 테지만 그 중간은 – 돌봄이 중대해지는 그 긴 시기 – 대부분의 환자와 가족들에게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뒤죽박죽인 기간이다. 알츠하이머 전문가와 권위자들은 마치 이 병이 정확하게 구분된 단계로 진행되는 것처럼 설명한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초기, 증상이 심해지는 중기, 그리고 가장 심각한 퇴행 증상을 보이는 말기. 이런 구분이 알츠하이머를 이해하고 논하기 쉽게 한다는 건 알지만 직접 체험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절대 그와 같지 않다. 우리의 질병 서사는 절대 깔끔한 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비논리적이고 예측 불가하며 가끔은 완전히 아무 일이나 닥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순환하고 증상이나 변화는 발작적이고 단속적으로 나타나며 그때마다 배웠다가 다시 모르게 되었다가 다시 배운다. 비극과 승리의 경험이 음악의 주제와 변주처럼 반복해서 일어난다. 아서 클라인만, 󰡔케어󰡕, 노지양 역, 시공사, 2020, 28쪽.


<우두커니>에서 알츠하이머병 환자인 아버지가 보여주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쇠약해지는 모습은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보다는 하루하루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아버지는 어느 날엔 불같이 화를 내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다가도, 다음 날엔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며 자책을 하고 한없이 수그러든다. 갑자기 은행에 가서 통장을 확인하자며 펄쩍 뛰고, 이튿날 손녀와 놀아주는 다정한 할아버지로 되돌아간다. 화자는 예측할 수 없는 이 모든 아버지의 모습들을 일률적으로 정리할 언어를 갖지 못한다. 이런 변화들은 어떤 지속적인 규정도 무의미하게 만든다. 화자에게 가능한 것은 그저 좀 더 나은 반응적 태도를 가지려 노력하는 것뿐이다. 그는 괴로운 순간들이 찾아올 때마다 버텨낼 여유를 찾고, 떠오르는 어지러운 마음들을 산책 중에 날려보내려 애쓴다.
화자의 기록은 때로 혼란스러워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어린 기억들과 마음들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다가, 어느 순간엔 소리지르고 욕하는 아버지에 대한 화와 답답함이 드러난다. 그러다가 문득 아버지에 대한 당혹감과 안타까움이 표현된다. 이 혼란은 알츠하이머 환자인 아버지 자신의 혼란스러움에 기인한다. 사건들이 서로 연관되어 발생하지 않고 임의적이며 비개연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때 서사는 무력해진다. 이 무력함에 대응하며 작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일정한 의미를 따라가며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화자는 환자인 아버지를 어떤 사람으로 일관되게 묘사하려 애쓰거나 아버지와의 경험들을 본질적으로 묶는 대신, 그 비일관적인 경험을 매 순간 충실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 충실함은 물론 화자의 관점에서의 충실함이다. <우두커니>에서 서술의 중심이 되는 것은 화자 자신이다. 독자인 우리는 일차적으로 작가의 관점에서 모든 사태를 관찰하며, 아버지 자신의 관점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밤중에 중얼거린 말들이 무슨 의미였는지, 그에게 알츠하이머병이 어떤 사태였는지, 죽음에 다가선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독자들은 알 수 없다. 그저 작품에 단편적으로 제시된 정보들을 통해 유추해볼 뿐이다. 대신 독자들은 일차적으로 화자가 무엇에 슬퍼하고 힘겨워하며 두려워하는지를 보게 된다. 그를 겁에 질리게 하는 것은 아버지가 난생 처음으로 보여주는 표정과 태도이다. 그를 힘겹게 만드는 것은 아버지가 작가와 남편에게 생전 입에 담지 않았던 거친 욕설을 내뱉는 모습이다. 그를 슬프게 하는 것은 너무나 연약해져버려서 “가느다란 빗줄기에도 힘없이 흩어지는 작은 꽃잎”처럼 변해버린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처럼 달라진 아버지의 모습에 작가는 웃어넘기기도 하고, 화를 내 보기도 하고, 그냥 무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간에 그가 평생 동안 알고 지냈던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사라져버리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자꾸만 나오는 눈물을 참느라, 나는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록되는 대상은 단지 화자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만이 아니고, 아버지의 쇠약해지는 모습 자체도 아니다. 투병 과정에서 침식되는 딸과 아버지의 관계야말로 이 작품에서 화자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화자는 아버지가 단지 대소변을 못 가리거나, 방문을 못 찾는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의심하는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아버지와 자신의 연결고리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버스정류장에서 자신을 기다려주던, 신문에서 짧은 살림정보 기사를 잘라서 건네던, 산책을 나가서 꽃 한 송이를 가져오던, 저녁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옆에서 함께 파와 마늘을 까 주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이제 화자 혼자만의 것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버지는 어린 시절 작가에게 생선을 구워주고 살을 발라 밥 위에 올려주던 자상한 모습에서, 도대체 누구인지 모를 사람의 표정을 지으며 단 한 번도 그에게 하지 않던 말과 행동을 하는 존재로 바뀌어간다. ‘나’라는 존재가 타인과의 관계들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라면, 그를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화자를 구성하던 한 부분이 무너져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두커니>는 가슴 아픈 관계의 상실들을 침착하게 적어가며 아버지와 자신의 마지막 나날을 그려낸다. 작가가 작품 <우두커니>를 처음 구상했을 때, 그는 딸의 임신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환한 모습으로 이야기의 끝을 맺으려 했다. 이렇게 결말을 지었다면 <우두커니>는 훨씬 밝고 희망찬 모습으로 끝났을 것이다. 관계가 가장 심각하게 흔들리고 파국으로 치닫는 마지막 나날들을 그리지 않고, 아버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화자는 아버지의 상태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기까지의 상황들을 모두 기록에 포함시킨다. 작가는 아버지가 무너져내렸던 마지막 모습까지 작품에 담아냄으로써 아버지와의 관계를 온전히 이야기하는 편을 택한다. 

3. 돌봄의 관계: 취약한 개인들의 상호의존

<우두커니>는 고통의 시간을 해석하는 대신, 매번 종잡을 수 없이 변화하는 순간의 경험들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여기에서 화자가 일관된 서사를 스스로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면, 독자들 역시 서사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은 이야기의 일관된 하나의 흐름이 아니라, 내재되어 있는 다른 주제이다. <우두커니>에 내재된 그러한 핵심 주제는 바로 돌봄과 관계의 문제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인 아버지를 돌보면서 화자가 겪는 경험들 속에서, 우리는 돌봄의 본성에 대해,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슬픈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 이 기록을 읽으면서 독자는 문득 궁금해진다. 작가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었을까. 간병은 대단히 힘든 돌봄노동이다. 더욱이 알츠하이머 환자를 대하는 것은 단지 신체적으로만 힘들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한다. 작가는 작중에서 빈번히 아버지와 소리 높여 싸우며 감정적으로 탈진 상태에 빠졌던 경험들을 솔직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스스로 묻는다. “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돌봄노동이 고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관계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보호자와 피보호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은, 단지 보호자 혼자만의 일방적인 의지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언제나 피보호자와의 연관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아무리 보호자가 최선을 다하려 노력해도 피보호자가 거부한다면 적극적인 돌봄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피보호자의 상태가 괜찮을 땐 사소한 일상조차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 <우두커니>의 화자가 아버지를 돌보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기분이 좋은 날 화자는 함께 산책하며 과거에 함께 은행나무 열매를 줍던 추억을 되새긴다. 그 모습이 너무 반가워 눈물이 왈칵 솟은 화자는 아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아버지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은 날, 화자는 아버지의 황당한 요청과 폭언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고민한다. 화자와 남편에게 퍼부어지는 아버지의 막말을 견디다 못한 부부는 서로 귀를 막아주거나 방으로 들어간다. 
돌봄노동 관계에서 돌봄을 받는 사람의 노력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보호자뿐만 아니라 피보호자의 참여 역시 돌봄이 성립되기 위한 조건이다. 보호자의 노고에 가려져 쉽게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돌봄은 언제나 피보호자와의 협업을 전제한다. 피보호자가 돌봄에 참여하기를 거부할 때 <우두커니>의 화자가 경험한 것처럼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보호자의 의사만으로 규정되고 진행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기에 돌봄노동은 수시로 엇나가고 실패한다. 그래서 보호자에게도, 또한 피보호자에게도 돌봄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다른 한편으로 돌봄의 관계성은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직접적인 사이만을 일컫는 개념이 아니다. 돌봄은 또한 주변인들과의 공동 작업이라는 점에서 관계적이다. 작품의 화자는 공동으로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화자의 남편에게 크게 의존한다. 작품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예민해진 화자와 아버지의 감정적 골은 깊어지고 화자는 정신적으로 지쳐간다. 이때 장기 간병경험이 있는 남편의 조언 및 그의 인내심과 상냥함은 화자가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지척에 사는 화자의 언니, 조카, 그리고 심지어 아버지와 과거에 이혼한 화자의 어머니도 돌봄에 간접적으로 참여한다. 주변인들의 지지와 조력, 격려가 없었더라면 화자의 돌봄노동은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자에게 돌봄은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는 소중한 관계들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다만 <우두커니>에서 돌봄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범위는 다소 한정적이다. 간병에 참여하는 관계의 폭이 거의 가족 범위로 협소하게 그려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돌봄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는 아니라는 것이 그와 같은 한정적인 묘사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봄노동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사실 돌봄노동이 의존하는 관계의 폭은 훨씬 넓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식당을 비롯한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너그럽게 수용해주지 않으면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느린 걸음을 기다려주는 행인 및 운전자들의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노인이나 장애인과 함께 밖에 나서기는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돌봄의 관점에서 우리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으며, 노키즈존 대신 아동과 함께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이런 의미에서 돌봄노동은 단지 주변 사람들만의 과업이 아니라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 의존하는 작업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외국의 속담은, 비단 아이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이처럼 돌봄노동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인 사태이다. 그것을 직접 하는 사람이든 받는 사람이든, 그리고 주변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든 조력을 받으며 이루어진다. 이는 우리가 사실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의 돌봄을 받아 본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돌봄을 제공해 본 사람이라면, 우리는 생각만큼 그렇게 단단하고 자립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치매로 인해 약해진 아버지의 모습처럼, 우리는 언제든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여 흔들리고 넘어지곤 한다. 화자의 돌봄노동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버거운 과정을 혼자만의 힘으로 극복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돌봄은 우리의 근원적인 취약성을 드러내줄뿐만 아니라, 이를 지탱할 수 있게 하는 관계성도 함께 보여준다.
뒤집어 말하면, 관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돌봄은 그 무엇보다도 어려운 과업이 된다.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혹은 보호자들 사이에 분배와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돌봄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돌봄은 돌덩이를 업고 수영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된다. 관계는 돈으로 단기간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손상된 부분을 임의로 땜질할 수도 없다. 좋은 관계의 구축과 유지는 오랜 시간에 걸친 꾸준한 노력을 요구한다. 작가가 작품 후기에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호자로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예요.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소중한 사람이 아프기 전에 엉킨 감정들을 풀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4. 결: 슬픔을 받아들인다는 것

다시 서론의 화두로 돌아가 보자. 쉽게 의미화될 수 없는,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나 고통을 그저 받아들여야만 할 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작품의 화자가 일차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담담한 기록으로서의 서술이다. 추상적 해석이나 덧붙임 없이 일어난 일을 그대로 말과 그림으로 남김으로써, 화자는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이야기를 풀어낸다. 화자는 이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추측건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에서 생겨난 응어리를 풀기 위함일 수도 있고, 아버지에 대한 마음과 그리움을 담아내기 위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혹은 다른 이유가 있든 간에, 화자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불현듯 밀려온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기록하며 아픔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이 기록 속에서 일관된 흐름을 추적하는 대신, 화자의 돌봄노동이 지닌 관계적 측면을 고찰했다. 돌봄은 우리가 처한 관계적 측면들을 드러냄과 동시에 우리의 취약성도 보여준다. 돌봄의 존재 이유는 우리 자신이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설 수는 없을 만큼 취약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잡하고 때론 지리멸렬하며 피곤하고 짜증스럽기 그지없는 관계망을 놓지 못한다. 오직 그 관계들 속에서만, 나와 타인의 슬픔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므로. 아무리 형언할 수 없이 커다란 아픔이라도, 그것을 버티고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은 오직 나와 함께 손잡고 있는 이들의 존재로부터 나올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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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주최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지정평론 제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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